'석유왕' 치킨게임에 유가 폭락…美 셰일 화약고로 불씨 옮겨붙나

입력 2020-04-02 17:36   수정 2020-07-01 00:02


국제 유가가 속절없이 내리고 있다. 올초 배럴당 60달러대였지만 이젠 20달러 선도 위태롭다. 원유 가격은 사우디아라비아와 러시아가 각각 증산 계획을 발표한 지 약 한 달 만에 3분의 1토막 났다. 양국이 증산을 실행하기 전인데도 그렇다. 1일 미국 서부텍사스원유(WTI) 5월물은 장중 배럴당 19.90달러까지 떨어졌다. 지난달 30일에도 19달러 선을 찍었다. 2001년 이후 처음이다.

사우디와 러시아는 2016년 이후 산유량을 조절해 원유 가격을 유지하는 협력관계를 이어왔다. 그랬던 두 국가가 지난달 초 돌연 감산 협의를 엎고 ‘석유전쟁’에 나섰다. 사우디는 이날부터 산유량을 1200만 배럴로 끌어올렸다. 지난 2~3월 하루평균 산유량(약 970만 배럴)보다 27% 많다. 러시아는 하루평균 30만 배럴을 증산하겠다고 맞받아쳤다.

국내 조선·정유업계는 새파랗게 질렸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여파로 원유 수요가 확 줄어든 와중에 주요 산유국 간 증산 경쟁이 ‘치킨게임’으로 치달아서다. 석유전쟁이 수개월씩 계속되면 기업들이 도산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까지 나온다.

사우디, 돈 필요해 유가 올려야

사우디는 현금이 필요하다. 실세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세력 확장을 위해서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사우디 왕실 관계자 등을 인용해 “빈 살만 왕세자가 사우디 에너지부 장관 등의 의견을 무시하고 러시아와 유가 전쟁에 나섰다”며 “빈 살만 왕세자가 주도하는 대규모 개혁에 자금을 대기 위해선 유가가 배럴당 60달러 선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빈 살만 왕세자는 사우디 국가개혁 프로젝트 ‘비전 2030’을 지휘하고 있다. 올해까지 비정부 부문 일자리를 45만 개 창출하고 기존 12.5%인 실업률을 9%로 낮추는 게 목표다. 이를 위해 초대형 개발사업을 여럿 추진 중이다. 사우디 사막 한복판에 서울의 43.8배 규모(약 2만6500㎢)로 사우디판 실리콘밸리와 할리우드를 조성하는 계획 등이다. 경제의 원유 의존도가 높은 사우디가 대규모 사업용 자금을 벌 방법은 원유 수출뿐이다. 사우디가 원유시장 우위를 확실히 점한 뒤 가격을 움직이려 하는 이유다.

여기에다 빈 살만 왕세자가 올해 왕위에 오르겠다는 야욕을 드러내면서 유가 전쟁 시점이 확 당겨졌다. 중동 현지 언론들에 따르면 빈 살만 왕세자는 오는 11월 사우디 리야드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이전에 살만 빈 압둘아지즈 사우디 왕으로부터 왕위를 이양받는 게 목표다. 이를 위해 지난달엔 차기 왕 물망에 올랐던 고위급 왕자 여럿 등 반대파를 긴급체포·구금했다.

일각에선 사우디가 러시아와의 갈등을 명분으로 삼아 미국 셰일가스업계 줄도산을 겨냥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사우디에 셰일업계는 오랜 눈엣가시다. 그간 유가 하락을 막기 위해 산유국 간 감산을 주도했지만 셰일업계가 생산을 늘리면서 별 성과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 워싱턴포스트는 “우방국인 미국의 산업을 함부로 칠 수 없었던 사우디가 감산 협의 불발을 빌미로 셰일업계 죽이기에 나섰다”고 분석했다.

러시아는 美 제재 완화 원해

러시아는 유가 전쟁을 국내외 현안을 타개할 지렛대로 쓰고 있다. 미국의 러시아 에너지 개발·수출 관련 제재를 완화하는 게 목표다. 러시아는 세계 1위 가스 수출국이다. 연방정부 세입의 절반이 가스와 원유 수출을 통해 나온다.

러시아는 대(對)유럽 가스 수출을 놓고 미국과 갈등을 빚어왔다. 미국이 러시아에 대한 유럽의 에너지 의존도가 높아질까봐 경제 제재 등으로 러시아를 견제하고 있어서다. 러시아와 독일을 잇는 천연가스관 ‘노드스트림2’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작년 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노드스트림2 가스관 건설사업에 참여한 기업을 제재한다고 발표하면서 공사 기업이 발을 확 빼는 바람에 사업이 중단됐다.

러시아의 북극 LNG 개발 프로젝트, 베네수엘라 석유 수출대행 등도 그간 미국의 방해로 지연되거나 무산됐다. 블룸버그통신은 “러시아는 이번 유가 전쟁을 바탕으로 미국과 협상에 나서 에너지 수출 제재를 완화하는 게 목표”라며 “러시아는 사실 미국 셰일산업 생사에 큰 관심이 없다”고 분석했다.

정치적 계산도 깔려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사실상 종신 연임을 가능케 하는 헌법 개정 작업에 착수했다. 자국 내에서 추가 집권 분위기를 조성하려면 경제 성장이 필수다. 이를 위해 미국과의 본격 협상에 들어간다는 분석이다.

“유가 전쟁 쉽게는 안 끝날 것”

사우디의 석유 증산이 지속되면 유가는 더 내릴 전망이다. 공급은 늘지만 코로나19 사태 장기화로 수요가 없어서다. 골드만삭스는 이번주 기준 세계 원유 수요가 하루 2600만 배럴 수준으로 줄었다고 분석했다. 다음달 수요 감소량은 하루 1870만 배럴일 것으로 내다봤다.

미국 정부는 급히 중재에 나섰다. 셰일기업이 대거 분포된 텍사스·콜로라도 등 지역은 트럼프 대통령 ‘표밭’으로 통한다. 유가전쟁으로 셰일기업이 타격을 받으면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도 어렵다는 평가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31일 빈 살만 왕세자, 푸틴 대통령과 연이어 전화회담을 했다고 밝혔다. 3일엔 엑슨모빌, 셰브런, 옥시덴털 등 미국 거대 에너지회사 CEO들과 긴급 회의를 하기로 했다. 저유가 사태 지원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사태가 장기화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사우디든 러시아든 원유 생산 손익분기점이 낮아 각자 원하는 결론이 나올 때까지 치킨게임을 더 끌 수 있다는 분석이다. 사우디의 원유 생산 비용이 배럴당 9달러, 러시아는 19달러, 미국 셰일은 35달러 수준이다. 블룸버그통신은 “빈 살만 왕세자나 푸틴 대통령은 버티기로 이름난 이들”이라며 “(트럼프 대통령의 발표와 달리) 러시아와 사우디가 대화하고 있다는 증거가 없고, 세 지도자가 모이는 회의가 열릴 것으로 기대되지도 않는다”고 분석했다.

선한결 기자 alway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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